나는 에디터의 최고봉에 서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이 글은 현재 나의 위치에서 뒤를 돌아봤을 때, 개발 경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반추하기 위해 쓴다.
수학 카드뉴스와 그 편집기
고2 무렵, 친구가 운영을 시작한 ‘유사수학 탐지기’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필진으로 합류했다. 처음에는 포토샵으로 카드뉴스를 만들었다. 20~30장의 고화질 카드뉴스는 당시 노트북에 과부하를 일으켰다. 수식이나 그래프를 외부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도 불편했다.
2017년, 막 등장한 Figma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플러그인을 직접 만들어 수식이나 그래프 입력을 자동화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개발 경력의 시작이다.
플러그인을 직접 만들 수 있다면, Figma의 방대한 기능 중 일부만 구현해 우리에게 더 맞는 에디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웹 개발을 배우고 리액트를 이용해 LaTeX과 contenteditable 기반의 간단한 WYSIWYG 카드뉴스 편집기를 만들었다. 최적화는 엄두도 못 냈고, 당시엔 GPT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쓰기엔 충분히 편리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에디터 개발의 시작이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유사수학탐지기와 관련된 개발을 이어갔다.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수학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3차원 도형과 그래프를 벡터 그래픽으로 렌더링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솔루션들을 만들어나갔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코로나가 터졌다.
재수, 오답노트, 그리고 KICEditor
코로나로 집에만 있어도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재수를 시도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패했다. 제사보단 젯밥에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오답노트를 예쁘게 만들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개발하던 에디터를 다시 꺼내 Marp라는 라이브러리와 결합했다. 오답노트는 예뻤다.
재수를 망치고 소호 사무실을 하나 계약해 회사 다니듯 출퇴근하면서 오답노트 편집기를 발전시켜나갔다. 이것이 KICEditor다.
첫 회사 스케치소프트, 그리고 창업
2021년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지금과 무척 달랐다. 컴퓨터를 할 줄만 알아도 개발자로 채용했다. 나는 클릭이 뭔지 알았고, 스케치소프트라는 회사로부터 합류 제안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 강연에서 보았던 3차원 스케치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회사였다. 제품명은 Feather였다. (2025 Apple Design Award도 받았다)운명이라 생각하고 커리어를 시작했다. 회사 일은 무척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선형대수와 미적분학을 실컷 사용할 수 있었고, 구르면서 웹 개발 실력도 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프론트엔드는 전혀 아니었지만.
새해가 되자 뭔가를 만들고 싶어져서 KICEditor를 발전시켜 외부에 공개했다. 사용자가 생겼다. 300명. 창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퇴사하고 예비창업패키지에 선정됐다.
사무실을 잡고 개발을 시작했다. 유저가 늘기 시작했다. MAU 1,000명까지 늘었지만 유료화는 계속 미뤘다.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페이퍼워크와 영업에 밀려 개발이 뒷전이 되면서 속도가 느려졌다. 망했다. 예비창업패키지로 받은 돈을 다 썼다.
쏠북, 미리디, 그리고 슈퍼러닝
회사를 정리하고 쏠북이라는 회사로 이직했다. 스튜디오라는 문제집 조판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영입됐다. 병역특례 준비도 시작했다. 회사 측에서 병특 준비가 꼬이면서 6개월 남짓 편집기만 개발하고 이직하게 됐다.
미리디 미리캔버스 에디터 팀으로 이직했다. 병특이 가능한 곳이었고, 한국에서 에디터를 가장 잘 만들고 집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정말 실컷 표와 SVG, 최적화에 대해 파고들 수 있었다.
1년이 지나 병역특례 전직이 가능해졌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더 넓은 스코프에서 에디터를 만들 수 있는 곳으로 이직했다. 그곳이 지금의 슈퍼러닝이고, 고등학생 때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집 편집기를 완성하기 위해 일하고 있다.
돌아보니 나는 한 번도 편집기를 떠난 적이 없었다. 회사를 옮겨도, 창업에 실패해도, 다시 돌아온 곳은 항상 에디터였다.
나는 앞으로도 에디터를 만들고 싶다. 학문적 논문도 써보고 싶고, 피그마 팀이나 어도비, 토스 같은 곳에도 가보고 싶다. (토스 데우스 제품이 궁금하다.) 책도 내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편집기에 나의 흔적이 닿게 할 것이다.
나는 에디터의 최고봉에 서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